한국 미술, 조선 미술, 우리 미술 사이에서
이 책은 ‘조선 민족’ 미술가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토대로 묶은 미술 순례의 기록이다.
젊은 시절 나는 유럽 각지를 다니며 수많은 미술작품과 만났다.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주로 일본에서 미술가들과 직접 교류할 기회도 생겼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과 같은 저서는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몹시 바라왔으면서도 미처 실현할 수 없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우리 미술가의 작품을 접하고 직접 알아가는 일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일본에 집과 직장을 둔 나로서는 그런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았다.
서양 미술이라는 광대한 숲을 찾아 돌아다니며 많은 작품과 작가를 만났지만 숲은 깊어서 아직 보지 못한 것도 많다. 목적지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어져가는 신기루와 같다. 하물며 나에게는 ‘조선 민족’이 일구어낸 미술이라는, 아직 밟아보지 못한 영역이 남아 있었다. ‘우리 미술에 대해 깊게 알아갈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몰라, 이해하지 못한 채 인생을 끝마칠지도 몰라…… .’ 슬슬 초로라고 불릴 법한 나이에 접어들어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55세가 되었던 2006년부터 2년 동안, 연구를 위해 한국에 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 늦어 때를 놓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참에 같은 민족의 언어, 습관뿐만 아니라 문화, 특히 미술에 대해 가능한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그 바람을 조금씩 이루어나갔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미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찾아보려는 순례의 여행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미술작품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기쁨이다. 먼 외국의 작가라던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도 작품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일지 자유롭게 상상하면서 때로는 정겹게 대화하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도 벌여본다. 마음속에서도 그럴 정도인데 살아 있는 미술가와 실제로 만나게 되면 그 기쁨은 더욱 각별해진다.
이 책에서 다룬 미술가 중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이쾌대와 신윤복, 두 사람을 제외하면 집필하면서 내가 지키려 했던 원칙은 작가 본인과 시간을 들여 대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 관심이 작품 그 자체는 물론이고 항상 미술가라는 인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나탈리 르무안. 이 네 명은 현존 작가이다. 저자의 입장에서 수다스런 이야기는 삼가야 옳겠지만 이들과 나눈 대화의 주제 중 하나를 미리 밝혀두자면, 바로 ‘가족’이다. ‘우리’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가족’에 관해 파고들어야 했다. 네 작가와 나눈 대화는 하나로 이어진 ‘가족의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재독 파견 간호사로 독일로 건너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송현숙 씨와는 2004년 가을, 그녀가 종종 귀국할 때마다 머물던 전라남도 본가에서 처음 만났다. 인생의 반 이상을 독일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음에도 농촌 풍경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빠짐없이 써오던 그림일기 한 페이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내 형들의 일이 그려져 있었다. 형들이 군사독재 시대 정치범으로 투옥되었을 무렵, 독일에서 그 뉴스를 듣고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그녀는 갑자기 그 페이지를 찢으려 했다. 나에게 그 그림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너무 놀라서 말렸다. 마치 농촌 아낙이 밭에서 토마토를 따서 쓱 내미는 듯한 자연스런 태도였다. 2004년 11월에 내가 가르치고 있는 도쿄케이자이대학에서 ‘디아스포라 미술의 현재’라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을 때, 송현숙 씨의 작품을 전시하고 인터뷰도 했다. (「붓질」 『계간 전야季刊前夜』 제4호, 2005년 여름호.）
5·18의 증언자이며 군정시대 정치탄압 피해자이기도 한 홍성담 씨와는 2004년 12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도쿄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인간이 아름다웠다」 『계간 전야』 제3호, 2005년 봄호.）이후에도 내가 서울 교외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고, 2012년 3월에는 경상남도 합천에서 열린 반핵평화대회에서 발언자로서 함께 서기도 했다.
송현숙, 홍성담 두 분도 이 책에서 다루어야 마땅할 중요한 미술가지만 새롭게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의 인터뷰를 부록으로 수록했다.
제목에 관하여
이 책의 제목으로 나는 ‘조선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이 용어에서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 혹은 ‘북조선(북한)의 미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법도 하다. 그러나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의 함의는 그런 닫힌 뜻이 아니다. 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보다 넓은 차원에서 바라본 총칭으로 사용했다. ‘한국 미술’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라는 용어가 제시하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는 협소하며 충분치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꾼 일에 대한 반론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한국문학의 좁은 틀을 넘어서」, 『디아스포라의 눈』, 한겨레출판, 2012.) ‘한국’이라는 호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재일과 재중 동포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모든 조선 민족에 의한 미술 행위를 ‘한국 미술’로 한데 묶어 부르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요컨대 우리들이 경험한 식민지 피지배, 남북 분단,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근현대사의 과정이 민족의 호칭 자체에도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호칭의 혼란은 곧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반영한다. 호칭의 통일은 현실 자체의 분열과 혼란을 극복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에 드러난 분열과 혼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시작하여 ‘우리에게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시금 마주해야만 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되묻는 일이다.
그럼에도 민족의 총칭을 ‘한(韓)’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다는 설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은 먼저 나의 생각을 이해해 주신 후, 따뜻하게 위와 같은 지적을 하신 적도 있다. 이 문제를 두고 내 의견만을 고집하려는 생각은 물론 없다. 다만 언젠가 다가올 어느 날, 남북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평등한 구성원으로 참가할 민족공동체가 평화 속에서 실현된다면, 나는 그 새로운 공동체의 호칭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를 기쁜 마음으로 논의하고 싶다. 아니, 이미 그 때는 논의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이름은 공동체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구성원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저절로 정해지리라. 다만 그 날까지, 그 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분열은 분열로서, 이산은 이산으로서 그 상처나 아픔마저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할 호칭으로 ‘조선’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선’이라는 용어를 고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말이 ‘학대’를 받아온 호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렇듯 어느 민족의 호칭이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민족차별의 멍에를 지게 되었고, 민족 분단 과정에선 이데올로기의 짐을 떠안았다. ‘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로는 공포마저 느껴왔다.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다. 그렇기에 나는 억울함을 당한 이 호칭을 말할 수 없는 ‘학대’에서 더욱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대’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미술에 빗금을 넣다
이제껏 내가 써온 책의 특징을 들어보자면 첫 번째는 제목을 짓는 데 서툴며, 두 번째는 출발할 때 내세운 질문이 하나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물음으로 확장되면서 끝맺는다는 점이다. 이번 역시 그런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 되고 말았다.
이미 말했듯 이 책의 이름을 짓기 위해 무척 고생을 했다. 번역자, 편집자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 미술 순례’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잊은 채, ‘우리’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전제로 사용한다면, 그 내용은 오히려 자기중심적이며 국수주의적이 될 뿐이다. 이는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 ‘우리’와 ‘미술’ 사이에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로 지으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한 까닭은, ‘우리’란 무엇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둘은 어떻게 맺어지는가를, 회답으로서가 아니라 질문으로서 독자에게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은 종종 “정답인지 무엇인지 빨리 가르쳐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희망사항을 이야기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답보다도 질문이 중요해. 질문을 세워놓고 타자와, 혹은 자기와 끝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태도가 보다 중요한 거야.”
‘우리 미술’을 자명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에도, ‘미술’이란 말에도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우리, 미술’이란 의심투성이의 대상이다. 그렇게 의심하는 마음가짐에 오히려 생산적인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미술’이라는 개념이 형식화되고 고정되면 쉽사리 권력으로 변한다. 즉 ‘우리’의 개념을 점유하고(즉 자신들만이 ‘우리’라고 주장하고) 타자를 배제하게 된다. 언어를 예로 들자면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만이 ‘우리’이며, ‘우리’란 어떤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리에 의해 배타적인 자의식이 공고해진다는 뜻이다. ‘언어’를 ‘미의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 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닌 위험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국어’와 마찬가지로 미술학교, 미술관, 관설 전람회, 미술 시장의 형성 등을 통해 만들어진 ‘미술’이라는 제도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며 국가주의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치 독일도, 천황제 국가 일본도 저들이 이해하는, 저들만의 ‘우리 미술’을 자민족 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구축해갔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우리 미술’이라는 말에 굳이 칼집처럼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로 표기하려 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 ‘빗금’을 통해 드러나는 것들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정통파 미술평론이나 미술사와는 꽤 거리가 있다. 다른 저서에서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 Said의 영향 아래, 비주류의 입장에 서서 주류의 이야기(master narrative)에 대항적인 이야기(counter narrative)를 대치하려는 태도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이 책의 시도 또한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의도는 ‘우리’(여기에서는 ‘민족’으로 바꿔 말해도 상관없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 또한 ‘우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구인, 세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추상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자명한 본질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 여러 조건으로 규정된 ‘컨텍스트’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즉 우리란 언어와 미의식, 나아가 ‘혈통’(이것은 물론 허구다)의 공통성이라는 관념으로 뒷받침되어 온 ‘우리’가 아니라, 근대사의 과정 속에서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지금도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를 말한다. 이런 컨텍스트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지만 동시에 그 컨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용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 역시 변화해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바람에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리’ 개념을 끊임없이 탈구축하고 재구축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월북 작가 이쾌대와 입양인 작가 미희는 저마다 다른 이유에서 ‘우리’의 범주에서 배제되어왔다. 내가 이 책에서 이쾌대와 미희를 불러온 의도는 그들을 포함한 새로운 ‘우리’ 개념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독자들을 향해 던지기 위해서였다.
결국에는 읽는 이에게 익숙지 않은 ‘우리/미술’이라는 표기를 제목으로 쓸 수는 없었지만, ‘우리 미술’이라는 기성관념에 칼집처럼 빗금을 그으려 했던 의도는 달라질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미술’이란 무엇인가?’, 과연 ‘우리’란 무엇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둘러싼 폭넓고 깊은 대화를 독자와 나누고 싶다. 그 대화가 독자들로 하여금 기쁨을 동반한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하고 시야를 넓히는 단계로 이어진다면 글쓴이로서 그 이상의 기쁨은 없겠다. |
